전철에서 술에 취해 몸져 누운 아저씨가 30대 정도의 여성에게 기대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어깨를 내주고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성적으로도 강요된 맥락이 보이지 않았고, 어떤 고귀한 의도나 특정한 애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엔 묘한 위안이 있었다. 짐승이 서로의 몸통에 턱을 얹고 자는 것처럼, 오랫동안 서 있다가 따끔따끔한 다리를 편안하게 뻗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지탱하는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자연스러운 표정이란. 그것은 일상에서만 볼 수 있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오늘 리뷰할 <우주진>은 나에게 그런 인상의 작품이다. 내용적으로나 관계적으로 포인트는 다르지만 이 작품의 두 주인공도 서로를 지탱해 나간다. 막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며 이야기의 내용을 끌고 가는 인물은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주인공이다. 그는 체호프의 갈매기 역 오디션을 위해 시간을 쪼개 연습한다. 연극이 시작되자 그녀는 버스 정류장 의자 위에서 이런 대사를 한다. (숨 고르며) 나 늦지 않았어요? 저는 이 날만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새엄마랑 나가셨어요. 나는 그래서 말을 타고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일랴 일랴 이 대사는 작중에서 두 번 정도 등장한다. 그녀가 연습하는 오디션의 이 대사에는 연기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현실적인 압박감으로 인한 초조함, ‘당신과 만나는 그 순간’을 위해 쉬지 않고 말을 달리게 한 치열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버스 정류장은 사람과 사물이 서로 엇갈리는 곳이다. 그 위에서 간절한 찰나를 그리워한 인물을 쫓기듯 연기하는 여주인공의 상황 자체가 그녀의 삶을 잘 보여준다.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모님과 스스로의 우려 때문에 자격증을 따는 그녀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꿈은 이미 사치를 넘어 욕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알바생들과 흐른 약간의 사랑의 기류까지 날려버리고 지친 몸을 끌어올려 방안의 불을 켠다. 그녀의 대사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 대사의 기반에 깔린 것이 간절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삶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에 의의를 두기에는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도, 억지로 하는 것도 마음껏 즐길 수 없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우주진이라고 비유한다. 이 우주진의 비유는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데, 첫 장면에서 배우는 무표정하고 조금은 쓸쓸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려 자신의 삶의 무게,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떠도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살짝 외치는 듯한 대사를 한다. 그녀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너무 닮았다. 너무 작고 익숙해서 간과하기 쉬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찰나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던 사람이 있기에 버스 정류장에서 사는 노숙자다. 노숙자는 한때 거대한 부를 움켜쥔 사업가였지만 몰락한 이후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떠나며 삶을 포기했다. 노숙자들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은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인지하고 그녀의 연기가 좋다고 말한다. 한참을 지나 다녀야 하는 버스정류장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잃은 자에게 말을 달려주는 사람의 모습은 찬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끝없이 움직여야 했던 사람에게 완전히 멈춰버린 자는 급격히 가벼워진 자신의 존재를 잠시 내린 닻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마주친다. 정확히는 버스 정류장에 여자가 계속 찾아간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음식을 주고받는 행위로 좀 더 정교해진다. 첫 번째 교환은 여자 없는 살림에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멀리 가게까지 달리다가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을 알고 배가 고프고 슬퍼서 정류장에 쓰러져 있을 때 일어난다. 노숙자는 그녀에게 폐기물 주먹밥을 보여준다. 여성은 그것을 잡기 위해 함께 정류장을 빙빙 돌았고, 이 장면은 상당히 밝고 장난스럽게 묘사된다. 개인적으로도 이 장면을 이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어 놓지만,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지 못해 굶주린 두 인물이 (그것이 폐기 상품이라 할지라도) 서로 먹여주는 상황 때문이다. 그리고 노숙자가 거침없이 꺼내 장난친 폐기 주먹밥은 노숙자들에게 소중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전철에서 술에 취해 몸져 누운 아저씨가 30대 정도의 여성에게 기대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어깨를 내주고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성적으로도 강요된 맥락이 보이지 않았고, 어떤 고귀한 의도나 특정한 애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엔 묘한 위안이 있었다. 짐승이 서로의 몸통에 턱을 얹고 자는 것처럼, 오랫동안 서 있다가 따끔따끔한 다리를 편안하게 뻗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지탱하는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자연스러운 표정이란. 그것은 일상에서만 볼 수 있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오늘 리뷰할 <우주진>은 나에게 그런 인상의 작품이다. 내용적으로나 관계적으로 포인트는 다르지만 이 작품의 두 주인공도 서로를 지탱해 나간다. 막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며 이야기의 내용을 끌고 가는 인물은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주인공이다. 그는 체호프의 갈매기 역 오디션을 위해 시간을 쪼개 연습한다. 연극이 시작되자 그녀는 버스 정류장 의자 위에서 이런 대사를 한다. (숨 고르며) 나 늦지 않았어요? 저는 이 날만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새엄마랑 나가셨어요. 나는 그래서 말을 타고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일랴 일랴 이 대사는 작중에서 두 번 정도 등장한다. 그녀가 연습하는 오디션의 이 대사에는 연기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현실적인 압박감으로 인한 초조함, ‘당신과 만나는 그 순간’을 위해 쉬지 않고 말을 달리게 한 치열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버스 정류장은 사람과 사물이 서로 엇갈리는 곳이다. 그 위에서 간절한 찰나를 그리워한 인물을 쫓기듯 연기하는 여주인공의 상황 자체가 그녀의 삶을 잘 보여준다.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모님과 스스로의 우려 때문에 자격증을 따는 그녀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꿈은 이미 사치를 넘어 욕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알바생들과 흐른 약간의 사랑의 기류까지 날려버리고 지친 몸을 끌어올려 방안의 불을 켠다. 그녀의 대사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 대사의 기반에 깔린 것이 간절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삶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에 의의를 두기에는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도, 억지로 하는 것도 마음껏 즐길 수 없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우주진이라고 비유한다. 이 우주진의 비유는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데, 첫 장면에서 배우는 무표정하고 조금은 쓸쓸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려 자신의 삶의 무게,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떠도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살짝 외치는 듯한 대사를 한다. 그녀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너무 닮았다. 아
이 경쾌한 장면이 지나가고 여자가 그것을 완전히 건네고자 할 때 슬픔이 폭발한다. 그녀는 노숙자의 상황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악의 없는 비리에도 불구하고 노숙자는 살아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구분하면서 주먹밥을 거부한 여성에게 그것을 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야말로 언제 죽든 상관없는 사람임을 밝히며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한다. 노숙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은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그녀를 통해 어떤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결국 여자는 더 커진 주먹밥으로 자신의 무례했던 것을 사과한다. 노숙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노숙자가 잘되던 시절에 찍은 사진을 함께 본다. 여자는 노숙자에게 왕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노숙자가 잘 들어준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그때 고구마장수가 지나갔고 노숙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업이 실패했음에도 고구마장수를 했던 것을 떠올린다. 여자는 고구마를 사서 노숙자와 나눠 먹는다. 그리고 노숙자에게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노숙자들은 이를 진지하게 듣고 자신을 우주진이라 한 여성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세상의 색감을 입히는 석양은 우주진 덕분이라고 말한다. 애초부터 이 땅부터가 먼지의 결합이 아니었던가. 여성은 노숙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별을 고하고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 두 팔을 뻗으며 처음처럼 우주 먼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그녀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부유하다. 그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우주 먼지가 아니라 쓸모있는 우주 먼지이며, 인식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일부를 가장 아름다운 하늘로 물들이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나에게 연극 <우주진>은 가볍지만 부드럽게 읽혔다. 흔한 이야기라면 흔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어떤 애정 어린 시각은 흔하지 않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혼란스러운 2030세대를 위한 것이다. 노숙자와 여성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결국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인다. 머물러, 부유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부분이 이 우주를 존재하고 아름답게 한다. 이 경쾌한 장면이 지나가고 여자가 그것을 완전히 건네고자 할 때 슬픔이 폭발한다. 그녀는 노숙자의 상황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악의 없는 비리에도 불구하고 노숙자는 살아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구분하면서 주먹밥을 거부한 여성에게 그것을 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야말로 언제 죽든 상관없는 사람임을 밝히며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한다. 노숙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은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그녀를 통해 어떤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결국 여자는 더 커진 주먹밥으로 자신의 무례했던 것을 사과한다. 노숙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노숙자가 잘되던 시절에 찍은 사진을 함께 본다. 여자는 노숙자에게 왕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노숙자가 잘 들어준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그때 고구마장수가 지나갔고 노숙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업이 실패했음에도 고구마장수를 했던 것을 떠올린다. 여자는 고구마를 사서 노숙자와 나눠 먹는다. 그리고 노숙자에게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노숙자들은 이를 진지하게 듣고 자신을 우주진이라 한 여성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세상의 색감을 입히는 석양은 우주진 덕분이라고 말한다. 애초부터 이 땅부터가 먼지의 결합이 아니었던가. 여성은 노숙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별을 고하고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 두 팔을 뻗으며 처음처럼 우주 먼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그녀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부유하다. 그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우주 먼지가 아니라 쓸모있는 우주 먼지이며, 인식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일부를 가장 아름다운 하늘로 물들이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나에게 연극 <우주진>은 가볍지만 부드럽게 읽혔다. 흔한 이야기라면 흔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어떤 애정 어린 시각은 흔하지 않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혼란스러운 2030세대를 위한 것이다. 노숙자와 여성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결국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인다. 머물러, 부유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부분이 이 우주를 존재하고 아름답게 한다.